어릴때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던 카메라는 Canon이었다. 줌렌즈는 없었고, 표준, 망원, 광각 각각 하나씩이었다. 너무 오래전이라 모델명도 잘 기억이 안난다. 나에게 처음 카메라가 생긴 것은 대학교 때이다. 사진 동호회에 들어가면서 아버님이 사주신 카메라가 Nikon FE 였던 것 같다. 당시에 Nikon 카메라 중에서는 제일 저렴한 것이었는데 FM2보다는 자동 노출 기능이 있어서 나름 괜찮았다.
무겁기도 하고 값싼 플라스틱을 많이 써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. 이걸 들고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좋은 사진을 찍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. 기억에 남을 만한 괜찮을 찍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3학년때 정도 였던 것 같은데 학보사 일로 주로 학내 데모 광경과 행사를 찍을 때 였던 것 같다. 그때 흑백사진과 광각렌즈의 맛을 제대로 배웠다. 암낭에서 손을 넣고 빈 매거진에 흑백필름을 말아서 넣는 것도 모두 그때 배웠던 것 들이다. 한 겨울에 따뜻한 물이 없어서 찬물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그런걸 다했나 싶다. D72, D76 오랜 만에 떠 올리는 현상인화 약품 번호이다.
빨간색 암등 아래서 흑백 사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심한 안개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 같이 묘한 느낌이 든다. 화학적 반응으로 얻어진 피사체는 종이에 담기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빛은 몇시간 전의 사건 속의 빛의 결과이기도 하다. 인간의 마음속에도 피사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마음 속에 빛이 만들어낸 결과 일것이다. 빛이 없다면 피사체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…
마음 속의 빛은 피사체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그 피사체의 그림자도 보여지게 할 것이다. 그 마음이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.
사라진 필림 카메라는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있던 잔상처럼 희미하다.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속에서 빛과 어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을까? 글쎄 잘 모르겠다. 그것이 존재하는지를…